용두팔산악회

김세봉의四字成語 산행기(소백산)

히말라야2 2006. 12. 28. 10:45

                     소백산행(小白山行)

     - 2006년 12월 24일~ 25일(1박 2일)

 

시황몽진(始皇蒙塵)

   단기 4291년(1958) 성북동 일원에 금빛 찬란한 서기가 서린 가운데 한 인물이 태어났다. 2품 이상의 고관대작을 지내고 일생을 마감해야 비로소 시호를 받을 수 있건만 그의 생이 예사롭지 않은 만큼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시호를 받았다. 

그가 바로 3황 5제의 품성을 두루 갖추었다 하여 처음으로 황제라 일컬으니 이름 하여 전시황이라.

   시황은 일찌감치 도승지를 차정하여 문한(文翰 : 글을 짓는 일에 관한 일)을 맡기더니(원래는 대제학이 맡을 일), 최근에는 어의 둘을 새로 제수하였는데 서교동 방면의 이화타(화타는 관우를 치료한 바 있는 명의)를 좌한의로 삼고, 쌍문동 일대의 김히포(히포크라테스는 서양의학의 아버지)를 우양의로 삼았다. 

   근자에 도성이 시끄러운 관계로 잠시 몸을 피하고자 하여(세상에서는 이를 서울을 피한다 하여 피서라도고 함) 좌우 양 어의를 대동하고 십승지지의 한곳인 풍기로 몽진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인왕산은 그 전초적 의미의 일환이었다.

   12월하고도 24일. 마침내 몽진 단행. 그러나 황제가 먼저 나타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모든 신료백관이 모인 것을 확인 한 후 어가(요새는 철마) 출행 시간에 맞추어 황비를 대동하고 가까스로 차에 오른다. 철커덕 철커덕 하는 벽제(임금이나 고관이 길을 갈 때 사람들을 물리치는 것) 소리에 시황이 가는 길은 거칠 것이 없었다. 

 

더구나 한어의가 손수 장만한 음양곽주(淫羊藿酒)를 사온서(술과 단술을 빚어 공급하는 일을 맡은 관청)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여 군신이 함께 즐기니 앞에 펼쳐진 길은 그야말로 주작대로(酒酌大路)였다.
 
<* 음양곽주(淫羊藿酒) : 음양곽은 양(羊)이 먹으면 음란해진다 해서 붙여진 명칭으로, 정력을 강하게 하고 건망증을 예방하는데 특효가 있다. 또한 신허(腎虛)로 인한 하반신 무력, 권태를 이기는 데에도 효과가 크다.>

 

봉환상봉(奉煥相逢)

 

   4시쯤 청량리를 출발한 어가행렬은 멀게 만 느껴지던 원주도 냉큼 앞으로 당겨 놓는 술법을 부렸다. 음양곽주의 효력은 나홀로 백두장군 봉환이가 시야를 가려서야 원주인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그 아니 절묘한가. 영빈관(영빈예식장)에서 만난 지가 오래지 않건만 그래도 늘 반갑기는 마찬가지라. 1당 백을 하는 봉환군을 지원 받아 어가 행렬은 계속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풍기문란

 

   마침내 행궁(行宮 : 임금이 임시 머무르는 궁궐··· 우리의 숙박소)이 있는 풍기(豊基)에 도착하였다. 용왕(속칭 점팔이 대왕)이 출현하여 어가를 맞는다. 도성을 부랴부랴 빠져나오느라 바위에 말려 둔 토끼 간을 미처 구해오지 못한 게 못내 미안하였으나 처방전과 음양곽주를 품은 어의를 대동했으니 그만하면 산중에서 맛본 해물(치악산에서 맛본 새우깡)에 대한 인사는 되었으리라.

   차를 분승하여 행궁(아마 다래숲이었지?)에 도착하여 만찬을 들 때는 용궁에서 준비한 인삼이 질펀하게 시야를 어지럽혔다. 밭에서 푸른 무를 뿌리째 뽑아 덥석 베어 물듯 서걱서걱 인삼을 먹자니 용왕의 접대가 갸륵하고 신재 주세붕 선생의 넉넉한 풍채가 눈에 선하다. 오리탕에도 인삼이 녹아들 듯 몸을 누이고 있으니 과연 풍기가 인삼의 고장이라는 게 헛말이 아닌가 싶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 이름이 헛되지 전하지 않음)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인삼 맛을 본 일행은 군신일체가 되어 금방 열이 뻗쳐  풍기문란의 현장으로 돌변하게 됨을. 잠시 짬을 내어 용왕은 전시황의 허락을 얻어 어의에게 몸을 내주고 진찰을 받으니 이어의는 친절도 하셔라. 멀리 풍기까지 왕진을 가신 셈이던가.

   풍기 문란은 광란(光亂)에서 비롯되었다. 5광 중 무려 4광이 출현하여 각기 무용을 뽐내는 데 그래도 압권은 비광이었다. 제광(諸光)이 비광 앞에서 모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데는 자타가 공인하지 않을 수 없는 반전에 있었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하이모는 과학’이라며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자칫 광의 세계에서 퇴출될 뻔 했던 그가 갑자기 과학을 벗어 던지고 본색을 드러내어 동지애를 구사하니 모든 광이 일제히 일렬횡대로 정렬하여 허리를 꺽어 절을 올렸다. 

 

그러니 같은 부류라고는 하나 그는 그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종대라고 하고 그들의 우두머리이니 백(伯)자를 더 붙였다. 잠시 후 그들이 하나같이 붉은 수건을 칭칭 동여매어 무리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건 영락없는 고려 말에 출몰한 홍건적들의 양태이다.

   역산의 잰 걸음이 오락가락 하는 사이 너나할 것 없이 한 마디씩 어전을 시끄럽게 해대지 않을 수 없었는데 노래라면 자다가도 깨어 일어나는 장원이 앞장 서는 것은 물론이요, 종대의 숙련된 춤과 부인의 노래는 가히 부창부수라, 듣고 보는 이들의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산을 집으로 삼는 역산은 기회만 있으면 부인에게 바치는 노래로 한껏 점수를 따기에 여념이 없고, 잔이 오가고 노래판이 구성지다 보면 가끔은 파트너도 바뀌게 마련이던가. 

 

30여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친구의 노래가 있어 좋았고, 30여 년 전 소풍 때 들은 친구의 노래를 신청하여 듣는 재미도 제법 솔솔하였다. 접어놓은 밥상 위에 올라가 벽을 부여안고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저 친구는 누구인가. 차마 역산이라고는 내놓고 말하지 않으련다. 베개를 안고 부루스를 추어대는 송장군을 위시한 몇몇의 춤사위는 시황 어전에 추어대는 문무(文舞)인지 무무(武舞)인지 도통 모르겠다. 휘돌아가면서 그들의 얼굴이 명멸하는 가운데 달마는 달마대로 신명이 나서 어우러진다.

 

쌍봉활약(雙奉活躍)

 

   밤이 이슥해지며 하나둘 잠자리를 찾아들 즈음에도 몇은 차마 아쉬움에 남은 술잔을 끌어안고 옹기종기 둘러앉는다. 역산은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며 협박성 방해를 놓고 소등에도 열심이다. 그는 전시황의 좋은 신하는 못 되어도 산신의 충량한 신복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법. 전시황을 노리는 자객들이 준동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치악산 송장군과 남산의 김장군이 일대 활약을 펼친다. 작전은 단순 명료하다. 김장군은 남산의 씩씩한 기상 그대로 비음(鼻音)의 고저장단을 통해 좌중을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만큼 시황의 시해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와 동시에 송장군은 주변 인물에 대한 몸수색을 해댄다. 혹시라도 무기를 소지한 불순 세력이 섞여 있을 가능성에 대해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 그 일차적인 목표였다. 이러한 작전은 원래 극비에 부쳐져야 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고 보니 일부 몰지각한 모해 세력 가운데는 쌍봉의 활약에 대해 자다가 봉창을 뚜드리는 일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지만 이럴 때는 아예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사실 숨은 공신이 하나가 더 있다. 원균이나 원호, 원두표 등 뛰어난 무장 출신을 많이 배출한 원씨 가문의 창연장군이 바로 그다. 그는 작은 불빛 하나, 분수대의 물소리, 동료들의 코고는 소리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예의 주시하며 온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가운데 시황의 호위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몽진에서 돌아오는 날 적어도 그에게는 어의들과 함께 호성 1등 공신에 책봉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동서분쟁

 

   날이 밝아 스물 닷새가 되었다. 시황의 호위는 대성공이었다. 떠날 시간은 아직 멀었건만 하나둘 일어나더니 엊저녁에 그렇게 먹어대던 모습은 어디 가고 배가 고프다고 성화다. 먹은 것만큼 요동을 쳐 소화시켰던 모양이다. 
   주인장이 끓여 준 맛있는 콩나물국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근심은 화장실에 가서 적당히 들 덜어냈다. 북두칠성을 바라보다 하늘을 가르고 지나가는 유성 하나를 본다. 이런 것은 시황에게 보고하지 말아야지. 또 무슨 변란이 있을까 지레 짐작하고 애꿎은 신하들을 닦달 하면 큰일이 아닌가.

   주인장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 그의 구수한 입담을 들으며 매표소를 지나 산행할 곳까지 이동하였다. 6시 40분, 드디어 산행이 시작되었다. 아직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어 헤드랜턴을 모자 위에 비끄러매고 길을 재촉하였다. 
   양의원이 어쩌자고 배탈이 났다. 엊저녁에 과음을 한 탓이라고 말을 하지만 후회막급이라.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 주변을 둘러보며 적당한 시기와 장소를 노려보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몇 번의 고배를 마시고 마침 뒤미처 온 한의원에게 약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웬걸. 한의원이 건네준 약을 냉큼 삼키면서 하는 말. “그런데 웬 약이 그리 크냐, 잘 못하면 목이 막히겠다.” 그러자 한의원이 조용히 하는 말. “그러게 씹어 먹어야지.” 양의원, “우리는 알약을 그냥 삼키는 데?” 그랬던 것이다. 한약과 양약의 차이, 한의원과 양의원의 다른 점을 목도하는 순간이었다. 

 

봉황지심(鳳凰之心)

 

   속이 쓰린 건 원창연도 마찬가지.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봉황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느냐?”는 것. 하긴 우리 같은 참새 따위가 어찌 봉황의 그 깊을 뜻을 언감생심 흉내나 낼까보냐. 봉황은 오똥(?)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니 속 깊은 데서 배어 나오는 구라파전쟁의 소용돌이 속에는 정녕 봉황이나 구만리장천을 날아갈 붕새나 아는 것이렷다. 그러나 참새도 이건 생각한다네. 차라리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망정 산 거북이 낫다는 것을. 원기사님 어서 쾌변을 보소서.
  
예민원조(銳敏元祖)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가다보니 어느새 샘터에 이르렀다. 바위 틈새에서 물이 배어나오는 데 그 맛이 시원하기가 그지없었다. 달마도사의 얘기인즉 바람이 바위에 부딪쳐 물이 생기는 것이라 하니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물 본김에 한 바가지를 더 퍼들고 목을 적신다. 

 

이곳부터 눈길이 예사롭지 않고 바람도 몹시 차다는 정보에 옷깃을 졸라매고 아이젠을 꺼내느라 부산한 장면이 연출된다. 형수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한 쪽만을 차고 있다가 석용이 부인이 건네주는 것으로 한 쪽마저 채운다. 정도전이 짝짝이 신발을 신고 왼쪽에서 보는 사람과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같은 쪽만 신은 줄 알거라고 큰소리를 쳤다더니 그 흉내라도 낼 참인가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영남알프스 이래 유명 인사가 된 원9단의 활약이 다시 한 번 눈부시게 전개된다. 석용이의 어부인께서 착용한 아이젠을 보고 잘못된 게 아니냐고 지적을 한다. 사슬형으로 된 아이젠에 신의 앞코가 정확히 걸려야 될 것 같은 데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는 것이 그의 지론. 마침내 그의 지적이 받아들여져 다시 고쳐 착용하게 되는 데 봉환이가 끼어들어 제대로 정리해준다. 그런데 형수도 아이젠을 착용하느라 한참을 애를 쓴다. 보다 못한 창연이의 참견이 이어지고 역시 봉환이가 행동으로 나선다. 

 

누구는 입으로 하고 누구는 몸으로 하느냐고 봉환이가 너스레를 떨어본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날을 기하여 가장 예수다운 실천적 행보를 보여준 것은 봉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었으니, 여러 사람의 신발에 아이젠 채워주는 것은 그것에 버금가는 행위가 아니던가. 하여간 창연이는 너무 예민하여 신경에 거슬리면 절대 참고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임을 실토하기에 이른다. 과연 그는 목불인견(目不忍見 : 눈 뜨고 차마 보지 못함)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며 예민함의 원조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장원동상(장원銅像)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올라서니 찬바람이 몸을 휘감고 돈다. 그런데 아뿔싸, 오늘도 장원이는 장원이 답게 제일 먼저 정상에 도착해 있었다. 그게 적어도 30분 이상 될 터인데. 정상에 부는 매서운 바람 앞에 그는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을 것이었다. 내려오는 사람의 전언에 의하면 동상이 다 되어 가고 있다고 빨리 올라가보란다. 

 

내 지금껏 세종대왕 동상, 이순신장군 동상, 퇴계, 율곡, 김유신···· 등등 여러 동상을 숱하게 접해 보았지만 이장원동상이라는 것은 꿈에서조차 들어본 일이 없는 데 어찌 된 사연인가? 장원아, 이제 앞으로는 너무 앞서가지 말려무나. 과유불급(過猶不及 :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듯 산은 우리에게 중용의 미학마저 선물하는 살가운 존재이다.


성탄추리(聖誕추리)

 

   비로봉 정상에 올라(9시 반) 기념촬영을 하고 서둘러 다음 행선지로 향하였다. 가는 길목의 나무마다 상고대가 형성되어 제법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마치 추리처럼 예쁘장하게 단장된 것도 있었다. 명보(강석용의 아드님)는 소백산 중에서나마 크리스마스 추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근처에 산장이 있어 잠시 들러 준비해 간 정종으로 속을 뜨겁게 덥힐 수 있었다. 

   비로봉에서 연화봉을 가는 어디쯤에서 너른 장소를 하나 잡아 두 팀으로 나누어 점심을 먹었다. 준비해간 버섯이며 라면, 떡, 만두 등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 내놓지 않으면 계속 짊어져야 한다는 부담에 모두 민첩한 행동을 보였다. 점심을 맛깔스럽게 하는 데는 정종과 죽엽청주도 한 몫 단단히 거들었다. 양쪽을 오가며 음식 왕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는데 봉환이는 앉았던 의자도 들고 오며 저쪽은 앉았다 일어나면 자리도 잃는 무서운 동네라며 사람을 웃긴다.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다른 일행 네 명이 우리 곁에 자리를 잡았고, 얘기 끝에 원주에서 온 사람들임이 밝혀져 원주에 기거하는 봉환이와 수인사를 한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전 종대와 성권이가 숟가락으로 그릇을 쳐대며 장단을 치고 몇은 덩실덩실 춤을 추어 잠시 주변을 흥겹게 하기도 하였다. 
   점심시간에 경미한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달마가 음식 장만을 하던 중 자신이 동쪽으로 온 까닭을 잠시 생각하다가 그만 손등을 조금 데었던 것이다. 게다가 눈 위를 걷다 보니 설상가상으로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뾰족한 부분을 그대로 깔고 앉아 버렸던 것. 이럴 때는 너무 학문에 힘쓰는 달마가 안쓰러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히 달마의 수난시대라고 할 만하다.

   자리를 정돈하고 출발하여 1시 반쯤에 연화봉에 이르러 기념 촬영을 하였다. 단양군이라는 표지가 그곳이 충청도 땅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비로봉이나 연화봉 할 것 없이 모두 불교적 내음이 확 끼치는 이름들이다. 그러한 것이 어찌 다만 소백뿐이랴. 우리나라 산 중에 거개가 불교식 이름으로 되어 있는 데는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불교가 우리네 삶과 밀접하게 연계된 데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연화봉을 기점으로 하행길에 접어들었다. 

 

희방사건(喜方事件)

 

   3시쯤 희방사(喜方寺)를 지나쳤다. 신라 선덕여왕(634년) 때 창건한 사찰이라고 하니, 무려 천 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내게는 낯익은 단어다 싶은 희방사. 그것은 바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월인석보>> 판목이 보존되었던 곳이라 하여 그랬던 것 같다. 웬 지 마음에 뜨거운 감회가 젖어듦을 느끼며 조금 내려오니 절과 머잖은 곳에 무려 28m나 되는 희방폭포가 바위를 등지고 저만치 걸려 있었다.

 

저도 또한 저렇듯 천 년 이상을 버티며 위용을 뽐내고 있었을 터이다. 일순간 예나 지금이나 지나는 이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며 눈길을 앗아갔으려니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이미 당시의 인걸은 오간 데 없고, 산천만 의구한 것에 자연의 크나큰 무게를 잠시나마 느껴본다.

   일행 중 몇이 늦게 하산하였는데 석용이가 다리가 꼬인 채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급한 대로 차 안에서 양의가 준비해 간 주사 한 방을 놓아 응급 처치를 하였다. 역산이 어느새 문가로 다가와 카메라를 들이대자 석용은 대경실색하여 손을 저어 뿌리친다. 예끼.
 
유유상종(類類相從)

 

   설왕설래 끝에 온천에서 목욕을 하기로 최종 합의를 보았다. 두 차에 분승하여 목욕탕에 도착하여 5시까지 약 1시간 20분 동안 목욕을 하게 되었다. 유황성분으로 이루어진 온천물의 미끈미끈한 기운이 그대로 몸에 전달되었다. 원탕은 27~28 도정도. 광란의 쇼는 온탕이라고 하여 예외를 허락하지 않았다. 

   빛나는 동문 네 명이 원탕에 들어가 나란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이라니, 정말 그들의 몸과 마음을 던진 장난기는 우리를 적나라한 모습 그 자체로 웃음바다로 만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이거야말로 유유상종의 현장이었으니, 예서 한 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범죄자들을 세워 놓고 범인을 물색하는 것 같다고. 무슨 말을 해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여줄 만한 넉넉한 친구들이에게 한 바탕 웃는 가운데 정감은 더욱 새록새록 돋아남을 확인해본다.

 

존경역산(尊敬歷山)

 

   목욕을 하고나서 기차 시간까지는 얼마간 여유가 있어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기로 하였다. 인삼칼국수를 먹기로 하고 들어갔지만 일부는 해장국으로 메뉴를 바꾸었다. 5시 50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에 몸을 싣기 위해 장사진을 친 가운데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두 패로 나뉘어 다른 객차를 이용해야 했다. 

 

그냥 조용히 상경하는가 싶더니, 그건 한갓 꿈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한쪽으로 인원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지나가는 맥주를 예사로 보내는 일이 없는 현장이 재연되기에 이르렀다. 

역산은 부인에게 잡혀가 단단히 교육을 받고서도 여전히 천관을 찾는 김유신의 말이 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어쩌다 존경하는 순만이가 되었는지 성규는 거침없이 뭐라고 줄여 말하곤 하는데 원창연이도 한 몫 거들기에 인색하지 않다. 창연이는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다간 본인도 모르게 과다 표현을 하기도 하고, 머잖은 곳에 부인이 앉아 있는 시황은 괜히 신료들의 말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어느 결에 합류한 토마스(제만) 어부인께서는 토마스를 경매에 부쳐 보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상품 가치가 너무 높아 엄두를 내지 못하는가 보다. 그러다 보니 돈을 붙여놓으면 돈만 가져가겠노라고 눙을 칠 수밖에. 그렇게 치열하게 달려온 서울이 눈앞에 펼쳐진다. 9분인가 연착했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가방을 챙겨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지는 것은 정한 이치. 또 그래서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한다던가. 빙 둘러서서 온 세상에 몇몇 부류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의 그 구호가 조용히 어둠을 갈랐다.
   
   “두팔 두팔 용~두팔.”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보금자리를 향해 삼삼오오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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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 이름 적힌 친구들이 이번 산행을 같이 한 고마운 친구들이다. 집행부 이하 모두 수고 많았다. 석용과 성권(?)의 쾌유를 빈다.

 

  참석 인원 : 이장원, 김성권, 이성규, 김종권, 원창연, 김형수, 송봉환, 박병철, 전시호부부, 백종대부부, 강석용 가족(3), 임순만부부, 이제만부부, 김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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