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설악릿지(석주길과범봉)

히말라야2 2009. 9. 21. 21:49

설악산(석주길+범봉 등반)


산행일자 : 2009. 9. 19. ~ 20.(1박2일)

산행코스 : 와선대 - 설악골 - 석주길 - 범봉 - 설악좌골 - 설악골

함께한 사람 : 스파이더(정인성), 창현(최창현), 당나구(강민규), 로부제(유재명), 히말라야(임순만  ㅎ) 등 5명

산행목적 : 외설악의 비경을 감상하러.....


“범봉을 가 보셨나요??“


설악으로 등반을 하러 들어가면 주로 장군봉과 울산암으로 많이 향하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릿지길도 많이 찾는 추세인데, 천화대를 등반하러 가다보면 꼭 이런저런 사정으로 왕관봉이나 희야봉

쯤에서 등반을 마치곤 했었다.  그렇다 보니 산 후배들과 어울려 설악을 논하다보면 “범봉 가봤어요?"

아직도 범봉을 못 올라 봤던 나는 할 말이.....   ㅎ


설벽의 10월 정기산행을 담당한 사람이 사정상 진행을 못하게 되어 설악이나 가자는 말에 "범봉"이 화제가 되고, “갈까?”

곧 바로 “가자”가 된다.  그렇게 설악을 향하고...

출발은 10명이 출발하여 해오름(김기덕)등 3명과 안정숙회원, 신연희님 등 5인이 공룡능선을, 스파이더, 창현, 당나구,

로부제, 히말라야 등 5인은 석주길 + 범봉을 등반하기로 한다.

 

19(토)일 오후에 출발하여 속초의 장사항에서 맛난 회를 안주로 일잔씩을 하고 와선대산장으로 들어 취침용 일잔을 더 한

후 밤 12시가 되어 잠자리에 들은 후, 불과 3시간 30분 만에 기상...

압솥에 밥을 하고 순대국을 끓여 한 그릇씩 말아 먹고 이마에 랜턴을 착용한 채 어둠을 뚫는 산행에 나선다.

비선대에서 공룡팀과 상호간의 안전을 당부하며 헤어지고 설악골로 들어 "석주길" 초입에 당도하니 랜턴이 필요없다.

 

장비를 착용하고 급경사를 치고 올라 "석주"를 만나러 들어간다.

20여년 전에 올랐던 석주길은 내겐 생소한 바윗길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재명을 앞세우고 등반을 시작한다.

초입에 있는 바위 능선에 올라서자 화채능선 위 구름 사이로 올라오는 태양은 더 이상 붉은 색이 아니다.

 

어지간한 바윗길은 모두 확보도 없이 휙휙 지나치고 오르다, 어느 순간 위기와 공포감을 느낀 누군가가 “줄 깔고 갔으면

좋겠는데...”   이후로 확보를 봐가며 한 봉우리, 한 구간을 조심하며 넘어본다.  개념도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몇 피치를

끝냈는지도 모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대기를 할 때면 1,275고지의 위엄과 함께 연결된 공룡을 바라보고, 또 돌아서

면 천불동이 왜 천불동인지를 말해주는 바위 봉우리들과 그 뒤로 화채능선을 감상하며 “역시 설악이야”를 연신 내뱉는다.

 

공룡의 1,275봉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단풍을 찾아보니 간간히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나무가 눈에 들어오고, 다음 주

부터는 능선으로부터 제법 붉게 물들은 설악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석주길 마지막에 초보가 섞인 10명의 등반 팀 덕에

시간은 지체되기 시작하고, 석주 동판을 마주하며 석주길이 끝난 후 범봉 릿지로 접어든다.

 

처음 마주하는 범봉의 시작은 난이도가 조금 있는 것 같아 암벽화로 갈아 신고 등반을 시작하여 한 피치 한 봉우리를 넘나

들며 등반을 하다보니 마지막 피치 앞 전망 좋은 너른 바위에서 계란까지 넣은 라면을 끓여 점심을 해결한다.

침니 등반을 끝으로 꼭지점에 올라서니 요델산악회에서 1967년에 설치한 범봉 동판이 나타난다.

 

사진 촬영을 위해 이쪽저쪽 바위로 옮겨 다니다 왼쪽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고 범봉 안부로 하강하는 길은

고통의 연속이다.  2006년 매킨리에서도 녹아내리는 눈 길에 썰매를 끄느라 순간적인 힘을 발휘하다 오른쪽 종아리 근육

이 파열됐었는데...

 

개념도에 25미터씩 세 번으로 하강하도록 되어 있어 자일 두 동을 한 동씩 교대로 사용하려다 두 번째 피치에서 앞 팀

60미터 두 동을 연결하여 하강, 따라한 것은 산행, 특히 등반에 있어 사전에 충분한 정보 수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 되었다. 범봉에서 하강은 두 길. 하나는 우리가 내려온 길로 두번째 피치는 60미터를 떨어지는 아찔

한 장거리 하강 이고, 꼭지점 에서 옆으로 떨어지는 길은 25미터씩 세번으로 나눠서 떨어지는 길 인 것 같다.

 

순간 구조대를 부르자는 후배의 말을 무시하고 목숨이 걸린 것도 아닌데 나 혼자 스스로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설악 좌골

을 내려서는 길은 말로 형용 못할 고행 길 이었다.

 

휴~~~  클났다!!!

한 두주 정도는 산행이 불가능 할 것 같은데.....

주린 가슴을 어찌 채울꼬~~~

 

 

 


(퍼온 글)

대한민국의 능선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갈라져나간 천화대의 ‘석주길’.

1969년대 고(故) 엄홍석, 신현주 두 분의 이름 끝 자를 따서 명명된 것입니다.


설악산에 하늘에서 꽃이 내려와 앉았다는 천화대(天花臺)에 석주길 이라고 하는 릿지코스가 있습니다.

"천 가지의 꽃이 피어있다" "바위에 피어있는 꽃" "하늘 꽃"이라는 숫한 설을 남긴 천화대는 그 만큼 아름답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입니다.  천화대는 비선대에서 철 계단을 지나 천불동 계곡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초입이

시작됩니다.  끝 지점인 공룡능선에서는 비선대 방향으로는 동북쪽으로 연결되어 있고 외설악을 대표하는 3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하는 구간 입니다


희야봉에서는 범봉을 앞에 두고 설악골과 잦은바위골 로 길이 갈라지고 맞은편으로는 범봉과 공룡능선으로 이어

니다.  특히 잦은바위골에 다다르면 50m, 100m 폭포는 장관을 이룹니다.  천화대에서는 화채봉과 동해바다가 보이

며 북동쪽으로 울산암이 바라보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풍광과 조망 또한 좋아서 등반 내내 발길을 멈추곤 합니다.

이중 설악골에서 범봉 사이에 성곽과도 같은 침니로 이어진 리지구간이 석주길 입니다.


석주길에 얽힌 가슴저린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펌)


 당시 요델산악회의 송준호, 엄홍석, 신현주 세 사람은 서로 자일 파트너였고

동시에, 절친한 친구이자 연인 사이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송준호는 사랑보다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말해 세 사람의 순수하고 소중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

엄홍석과 신현주의 곁을 홀연히 떠납니다.


송준호가 떠난 얼마 후 엄홍석과 신현주는 연인 사이가 되었고,

두 사람은 설악산 천화대 천당폭으로 빙벽등반을 하러 갑니다.

그러나 빙벽을 오르던 중 신현주가 그만 실족을 하자

당시 빌레이(확보)를 보던 엄홍석은 연인인 그녀의 추락거리를 줄이기 위해서

빙벽 아래로 자신의 몸을 날립니다.


 그러나 빙벽에 설치한 확보물이 하중을 견디지 못했고


두 연인은 한 자일에 묶인 채 추락하여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 후 두 친구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송준호는

악우인 엄홍석과 신현주의 넋을 달래려 68년 7월 지금의 천화대 석주길을 개척하며

엄홍석의 이름 끝 자인 "석"과 신현주의 끝 자인 "주"를 딴 석주길이라는 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산악계에서는 처음 길을 개척한사람에게 "명명(命名)권" 을 주게 되는데

송준호에게 명명권을 주어 두 사람의 석주길 이라는 길이 설악산 천화대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석주길’이라고 새긴 동판을 만들어

천화대와 만나는 바위봉우리의 이마 부분에 붙여

두 사람의 영전에 바쳤습니다.


 하지만 송준호 역시 1973년 초 토왕폭을 단독으로 오르다가 실족하여

먼저 간 두 친구의 영혼을 뒤따르게 되고

그의 시신은 그토록 사랑하던 친구인 엄홍석과 신현주의 곁에 뭍히게 됩니다.


그렇게 석주길의 신화가 설악산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1973년 새해 첫 날밤 등반 하루 전 그는 엄홍석과 신현주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깁니다.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번지 없는 주소로 엽서를 보냅니다.


받는사람 "석주 귀하" 주소는 "벽에서 노루목" 보내는 사람 "준" 그것이 전부인...


한편 서울에서는 토왕성폭포 등반을 마치고 돌아오겠다던 송준호의 애인이

1973년 1월5일 오후2시 서울 중앙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영을 앞두고 그를 기다립니다.

그가 나타나지 않자 뇌리에 스쳐오는 송준호를 생각하며 극장가를 떠납니다.

송준호는 그녀가 짜준 목도리와 장갑 모자를 가슴에 품은 체 토왕폭에서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송준호는 토왕폭을 등반 후 돌아와 그녀와 함께 스위스 등산학교를 유학 한 후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해 가을 산악회에서는 추모등반을 설악산 용아장성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동판은 제14봉에 부착했습니다.

애인은 동판에 송준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고인의 뜻대로 강하게 살아가겠다고".


그 후 1974년 1월2일 1주기가 되던 해 송준호의 산 친구는 설악의 노루목을 찾았습니다.

그는 산 친구인 송준호에게 절을 하며 약속합니다.

그녀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그 이듬해 그들은 결혼해서 그들의 꿈이었던 목장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설악가처럼 굽이져 흰띠두른 능선길 따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설악산 노루목에 엄홍석 신현주와 함께 묻혀있으며 이들 세사람의 충혼비는 이러합니다.


"시간(時間)과 존재(存在)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岳友)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일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그 대담한 의지로 회생하리라."

 설악가는 세사람의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그리며 지어 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구전으로 대학 산악부에서 많이 불려지고 있습니다.

<난 바람 넌 눈물>로 가요계에 데뷔한 산악인 가수 신현대님의 목소리로 들어 봅니다.


 마지막 3절이 찐하고 슬프네요.

송준호가 죽은 친구(엄홍석, 신현주)를 생각하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악우가 찍은 내 사진>

 

 

 

 

 

 

 

 

 

 

 

 

 

 

 

 

 

 

 

 

 

 

 

 

 

 

 

 

 

 

 

 

 

<내가 찍은 사진 몇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