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최고봉 매킨리 [2]
정상 풍광은 분명한 대가이자 보상
선두 자리를 넘겨받자 오히려 힘이 솟는 것 같다. 마지막 언덕을 넘어 넓디넓은 설원인 풋볼필드와 정상 능선이 마주보이자 14년 전 기억과 지금은 만날 수 없게 된 선배의 얼굴이 떠오르고 한편으론 흥분이 인다. 당시 일행 6명은 화이트아웃과 강풍이 번갈아 등장하는 상황에서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데날리패스를 올라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불편해지더니 설사를 하고 말았다. 안전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리고-. 다시 바지를 입었을 땐 엉덩이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손가락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가슴팍에 손을 넣고 주무르기를 20여 분. 손가락이 서서히 풀려가자 마음이 놓였다. 다시 용기를 내어 일행을 뒤쫓아갔으나 이미 거리는 내 시원찮은 걸음으로 좇아가기에는 너무 벌어져 있었다.
어느 순간 광풍이 불어왔다. 설릉에 피켈을 꽂고 거의 기도자세를 취했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때 누군가 등을 툭툭 치며, 괜찮냐 묻더니 함께 오르자고 권했다. 외국 클라이머였다. 그는 너무나도 편안한 모습으로 앞장서 나아갔다. 그렇게 생면부지의 외국 클라이머 뒤를 좇아 오르기를 1시간쯤 했을 때 어마어마한 설원인 풋볼필드가 펼쳐지고, 정상 능선에서 움직이고 있는 일행의 모습이 바라보였다.
일행은 이미 하산길에 접어들고 있었고, 30분쯤 지나 풋볼필드에서 만난 선배 산악인 한상국씨는 “합의했던 대로 내려가자”며 하산을 종용했다. 당시 개인 8명이 모여 나선 원정이었던 터라 사고 시 뒤처리가 걱정이 되었다. 해서 등정길에 나섰다 마지막 등정자가 내려올 때 만나는 사람은 무조건 하산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 제안은 기자가 했던 것인데, 자충수에 걸려든 셈이 되고 만 것이다.
풋볼필드를 지나 급경사 설벽에 접어들자 클라이머들의 발걸음이 더욱 느려진다. 모두 고뇌에 차 있다.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것일까. 한 발 한 발 오르면서도 왜 이렇게 무의미한 행위를 하나 회의가 인다. 그것도 적잖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가면서까지. 매킨리 정상에 오르면 그 이유가 깨달아질까?
- ▲ 북미 최고봉 정상에 오른 대원들. 오른쪽에서부터 김병석, 김덕환, 기자.
어렵사리 설벽을 올려치고 카힐트나혼에 서자 많은 배낭이 놓여 있다. 정상을 향한 등반객들의 소지품들이다. 바람이 매섭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좁은 설릉을 따르다 왼쪽으로 떨어지면 150여m 아래 풋볼필드요, 오른쪽은 3,000여m 아래 이스트포크 카힐트나빙하(East Fork Kahiltna Gl.)다. 바람이 획 불어댈 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선다. 그래도 멋진 풍광에 배낭에 넣어둔 카메라를 끄집어내는 모습에 김덕환씨는 어이없어한다.
정상이 다가올 즈음 외국 산악인들이 내려오고 있다. 바로 직전 등정의 기쁨을 누렸을 텐데 표정이 무겁다. 이렇게 무거운 표정을 얻으려고 북미 최고봉에 올랐단 말인가.
강풍이 휘날리는 정상은 카힐트나혼에서 올라온 날카로운 설릉과 캐신리지, 그리고 사우스 버트레스(South Buttress) 3개 능선의 꼭지점에 솟구쳐 있다. 남쪽 캐신리지쪽은 웅장하면서도 험난하고, 그 뒤로 헌터는 기운차게 솟구쳐 힘을 북돋아주고 있다.
정상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동쪽 산군은 멀리 대평원과 이어지면서 편안한 산세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런 풍광을 보며 가슴 벅차하기 위해 50kg 가까이 나가는 무거운 짐을 끌고 매킨리시티로 올라서고, 동상을 각오하면서 하이캠프를 거쳐 예까지 올라온 것이란 말인가. 그래도 분명 보상이었다.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풍광이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김덕환씨는 ‘현수야, 사랑해’ 글자를 써넣은 스포츠타월을 펼쳐들고 찰칵하고, 김병석씨 역시 가족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듬뿍 적어넣은 타월을 펼쳐들고 찰칵한다. 그 사이 외국 산악인들이 한 명 한 명 올라온다. 모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래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우리에게 카메라를 건네주곤 한다. 한 순간 한쪽 아이젠으로 반대쪽 신발을 찍으면서 균형을 잃고 미끄러지는 클라이머가 있었으나 다행히도 500여m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멈추었다.
하산길-. 다리는 천근만근이지만 마음은 평안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설릉을 오르는 데 왜 그리 힘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외국 클라이머들 역시 마찬가지. 정상으로 향할 때의 무표정함 대신 부드러운 눈길을 주고받으며 등정을 축하해준다. 이제 마음놓고 카메라를 눌러댈 여유도 누리고, 김덕환씨는 아껴두었던 보온병 안의 따뜻한 물을 선배들에게 따라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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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정 9시간, 정상체류 1시간30분, 하산 4시간30분 등 15시간의 산행을 마치고 하이캠프로 내려섰을 때는 밤 10시. 그런데도 텐트 밖은 밝기만 하고, 텐트 곳곳에서 도란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바람 소리까지도 다정스럽게 느껴진다.
아름답고 다양한 산세 지닌 북미 최고봉
이튿날 아침, 그제 저녁이나 어제 아침과 달리 클라이머들이 텐트 앞에서 커피 한 잔씩을 손에 들고 담소를 나누거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등정의 기쁨을 만끽하는, 너무도 행복한 표정들이다. 이제 서두를 이유도 없다. 몸이 이끄는 대로 마음 닿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정상을 오른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이자 자유가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오후 11시경, 텐트를 걷고, 배낭을 꾸린 다음 다시 한 번 빌리지 산책에 나선다. 역시 아름다운 곳이다. 매킨리만큼 아름답고 다양한 산세를 지닌 산도 드물 것이다. 도화지를 펼쳐놓은 듯 깨끗하고 거대한 빙하 주변에 반짝이며 솟구친 수많은 설봉과 설릉들-. 그와 더불어 이 산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흰 눈만큼 순수한 등산인들이 찾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산이 수많은 고산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느껴져 왔고, 14년만에 다시 찾은 게 아닌가 싶어졌다.
헤드월을 향해 내려서는 사이 부지런한 클라이머들이 벌써 올라오고 있다. 고뇌에 찬 표정들이다. 간혹 정상을 밟았냐 묻곤 축하해주는 클라이머들도 있지만 대개는 말 한 마디 건넬 힘조차 없어 보인다. 그들은 우리가 겪었던 똑같은 길을 따르며 환상을 좇는 멍청이 산꾼들이었다. - 웨스트버트리스 등반법
캐시 앤드 캐리 방식으로 캠프 이동
‘위대한 산’이라는 의미의 데날리(Denali)라는 원래 이름과 함께 미국 제25대 대통령의 이름인 매킨리(Mckinley)로 불리고 있는 북미 최고봉은 경비행기를 타고 데날리 국립공원의 명봉들을 바라보면서 설원에 내려앉아 등반을 시작한다는 점, 거대한 설원과 반짝이는 설봉이 자아내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 여기에다 크레바스, 설벽, 설릉 등 고산이 갖추고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모든 짐을 등반객 스스로 옮기면서 등반하기에 여느 고산보다 더욱 뜨거운 성취감까지도 누릴 수 있다는 점 등이 매력인 고산이다. -
- ▲ 탈키트나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35분만에 닿은 랜딩포인트. 날씨가 허락한다면 매킨리뿐 아니라 헌터(앞봉), 포레이커 등 데날리 3대 봉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실상 대다수 산악인들이 등로로 삼는 웨스트버트레스(West Buttress)를 비롯한 여러 루트의 등정율은 5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게 데날리 국립공원측의 통계다. 또한 위험한 구간마다 고정로프가 깔려 있거나 확보물이 박혀 있고, 전진베이스캠프인 매킨리시티(4,300m)와 마지막 캠프인 데날리빌리지(5,250m)에 레인저가 상주하고 있음에도 해마다 사고가 끊이지 않는 산이다. 탈키트나 산악인 묘지에 적혀 있는 사망자 수만 해도 150명 가까이 된다.
한국 산악인의 경우 79년 에베레스트 초등자인 고상돈씨가 이일교씨와 함께 추락사하는가 하면 92년 3명, 94년 2명, 그리고 2006년 1명 등 여러 차례의 인명사고가 일어나 한동안 악명 높은 산으로 인식돼 왔다. 올해의 경우 5월 중순 일본 산악인 2명이 캐신리지 등반 중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번 등반 때도 C2(2,900m)에서 C3(3,400m)로 오를 때는 화이트아웃에 길을 찾느라 고생해야 했고, 윈디코너를 향할 때는 추위와 강풍 때문에 긴장할 정도였다. 매킨리시티에 머무는 1주일간 동상환자 수송을 위해 세 차례나 헬리콥터가 올라왔다. 대부분 등정 후 하산한 이들로, 레인저들은 헬리콥터로 후송된 이들 대부분 동상부위를 절단할 가능성이 높다고 귀띔해 주었다.
매킨리 등반 중 가장 애를 먹는 게 짐이다. 적어도 50kg가 넘는 짐을 한 번에 옮기기는 어려운 일.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스키나 설피를 신고 배낭과 썰매를 이용해 캐시 앤드 캐리(cache & carry) 방식에 준해 짐을 옮긴다(현지에서는 우리 산악인들이 짐을 올려놓는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데포’라는 말 대신 캐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캠프 구간을 두 차례씩 짐을 나누어 옮기기도 하고, C3(3,400m)까지는 하루에 하나씩 캠프를 올린 다음 경사가 가파르고 청빙구간이 나타나는 모터사이클힐 아래 C3에 스키와 설피 외에 예비 식량과 불필요한 장비를 데포시킨 뒤 매킨리시티(4,300m)까지는 두 차례에 나누어 짐을 옮기기도 한다. 이 경우 첫날 윈디코너 너머 설원에 짐 일부를 옮긴 뒤 C3로 내려와 하룻밤 자고 이튿날 나머지 짐을 가지고 매킨리시티로 향한다.
매킨리시티까지 오르는 사이 썰매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산악인들이 많이 있다. 안전벨트나 배낭에 끈으로 연결시켜 놓은 무거운 썰매를 끌고 올라가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인데 좁은 설릉이나 설사면을 오를 때면 옆으로 쏠리는 일이 생겨 짜증스럽게 하고, 하산길에는 앞으로 쏠리거나 뒤집히면서 성가시게 한다. 썰매에 짐을 실을 때는 무게 중심을 가능한 한 낮게 하고, 등반자 뒷줄을 썰매 위쪽에 걸어놓은 카라비나에 통과시키는가 하면, 하산할 때는 스키폴로 연결시켜 밀면서 내려가는 것도 요령이다.
- ▲ 탈키트나의 K2 항공사 부근의 산악인 묘에 있는 고상돈 추모비.
- 매킨리시티에 도착 이튿날은 푹 쉬면서 대열을 정비하고 세쨋날 짐의 일부를 헤드월(Head Wall·약 4,940m)과 엄지손가락바위(Washburns Thumb) 사이 설릉에 짐을 묻어둔다. 관리소측은 1m 이상 깊이로 눈을 파낸 다음 짐을 묻어두라고 권한다. 무엇보다 까마귀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다.
짐을 웨스트버트레스 능선 상에 올려놓고 내려온 다음에는 반드시 하루 이상 휴식을 취하고 하이캠프인 데날리빌리지(Denali Village·5,250m)에 올라선 이후에도 역시 적어도 하루 이상 쉬면서 고소에 적응한 다음 등정길에 나서라는 게 레인저들의 충고다.
정상으로 향할 때 가장 위험한 구간은 하이캠프에서 데날리패스(Denali Pass·5,547m)로 이어지는 사면 트래버스. 매년 레인저들이 30m 안팎 거리로 스노바를 박아놓고 간간이 카라비나까지 걸어놓아 등반객의 경우 자일만 통과시키며 진행하면 큰 문제가 없지만 오후 들어 하산길에는 눈길 폭이 넓어져 대부분 안자일렌도 하지 않은 상태로 내려서곤 한다. 그러나 고산증이나 탈진상태에 이른 이들은 자일 확보 없이 내려서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추락시 400~500m 아래 크레바스 지대까지 곧바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년에 한 번씩 추락사고가 일어나 데날리 국립공원측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으로 꼽고 있다.
데날리패스를 넘어선 이후 풋볼필드까지는 크게 위험한 구간이 없다. 단 해발 6,000m대의 대설원인 풋볼필드(Football Field)까지는 고소증세로 저하된 체력과 컨디션으로 올라야하고, 정상 능선에 올라서려면 수직고 150m의 가파른 설사면을 올려쳐야 한다. 정상 능선에 올라선 이후로는 설벽 상단을 가로지르거나 좁은 설릉을 따라야 하는데, 바람이 불 경우에는 매우 위험한 구간이다. 중간 중간 박혀 있는 스노바를 잘 이용하면 안전하게 북미 최고봉 정상에 설 수 있다.
장비는 동계 고산장비에 준해야 하며, 식량은 일정보다 넉넉히 준비해야 한다. 등반을 마치고 탈키트나행 경비행기를 타기 위해 랜딩포인트로 돌아온 뒤에도 악천후로 비행기가 뜨지 않아 여러 날 머물러야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랜딩포인트에도 2~3일분의 식량을 눈 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매끼 식사는 동결건조미보다는 압력밥솥을 이용하는 게 컨디션 유지에 좋다는 게 경험자들의 평이다.
데날리 국립공원 소속 탈키트나 레인저 사무소장인 로저 로빈슨씨(Roger Robinson)는 “쓰레기와 분뇨 처리에도 철저하게 신경써야 하지만 바람과 추위가 대단한 산이므로 특히 동상에 조심해야한다”며, “포레이커 정상에 버섯구름이 형성될 경우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안전지대로 피하라”고 당부했다. 로빈슨씨는 “하이캠프 이후 등정시간은 컨디션이 좋을 경우 8시간 이내에 가능하지만 18시간 이상도 걸린다”며 “모든 동상의 50% 이상, 모든 사고의 25% 이상, 모든 재난의 55% 이상이 등정 당일에 일어나므로 무리한 등정은 삼가라”고 덧붙였다.
앵커리지와 탈키트나 사이의 도시인 와실라에 거주하며 20년 동안 한국 산악인들의 매킨리 등반을 도와주고 있는 오갑복씨(www.denaliclub.com)는 “간혹 무모하게 등반하는 한국인들 때문에 황당한 경우를 겪을 적이 있다”며, “준비를 철저히 하고 여유를 가지고 등반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등반시즌은 5~6월 두 달간이지만 5월은 춥고 날씨 변화가 심하므로 6월 초나 중순을 등정시기로 잡고 일정을 짜는 게 바람직하다. 데날리 국립공원은 매킨리 등반객에 한해 1인당 120달러의 입산료를 받고 있다. 등반 두 달 전까지 탈키트나 사무소에 입산신청을 해야 하며, 한 달 전까지 팀당 대원 1명을 추가 신청할 수 있다. 문의 전화 탈키트나 사무소 001-907-733-2231. 원정대행 문의 강가딘여행사 02-737-9981.
- / 글 한필석 차장대우 / 월간 산 [465호]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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