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킨리 등반기(제5부) - 귀환
귀환
7월1일(토)
전날 저녁에 총각김치 찌개(햄, 버섯, 참치 두캔)로 김치는 전부 동이 났고 오로지 인스턴트 국만 남았다.
오전이 되면서 날이 개는 것 같아 죽과 미숫가루로 아침 식사를 하고 행동식을 먹으며 철수하기로 한다.
13:00경 출발하여 윈디코너에 당도하니 예상대로 바람이 없다.
운행 중 다행이라면 이 윈디코너를 네 번 지나는 동안 바람다운 바람을 맞아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따뜻하다 못해 더운 날씨 속에 껴입은 옷 속으로 땀이 스민다.
윈디코너를 벗어나자 헬맷을 벗고 옷을 정비했다.
두 개의 언덕을 내려서는 급경사 길에 바로 뒤에 있는 용주형이 썰매의 끈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짜증이 난다.
용주형에게 짜증 섞인 싫은 소리를 하며 모터사이클 힐까지 왔다.
썰매를 끌고 가는 가장 급한 경사의 언덕이라 짜증나는 대로 힘겹게 내려서서 Camp site(3캠프)에 도착하는데
눈이 녹아 발자국이 상당히 깊이 빠진다.
빨리 설피를 찾아서 신고 싶은 심정이 굴뚝이다.
발이 무릎 깊이까지 빠진 상태에서 썰매를 끌기 위해 발을 빼며 힘을 주는 순간 오른발 뒤 종아리 부분이 감전된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가가 엄청남 힘으로 때린 느낌이 든다.
깜짝 놀라 주저앉으며 아마도 썰매가 급하게 따라와서 미끄러지며 내 종아리를 때린 것이겠지 생각하며 뒤를
살펴보는데 아무것도 없다.
일행들이 다가와 설명을 듣더니 아마도 실 근육이 끊어진 것 같다는 말을 한다.
통증이 심한 상태에서 일어서려니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더구나 눈 속에 발이 푹푹 빠지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통증이 심하여 걸을 수가 없다.
큰일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너무도 먼데 어떻게 가야 한단 말인가?
걱정에 고민을 하고 있는데 박병철씨가 약을 준다.
지난 설악산 훈련 때 자신도 실 근육이 끊어진 적이 있어 병원에서 처방 받아 약을 지어 왔단다.
마침 Greg도 무슨 약인지 진통제라며 3알을 건네기에 같이 먹어 버렸다.
지금 이 순간이라면 먹고 죽는 약이 아닌 다음에야 그 무엇인들 먹지 못하랴~
멀리서 헬기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신선배님을 후송하러 오는 헬기이려니 생각하고 있는데 쓰레기를 수거하기
위하여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는 헬기란다.
너무도 반갑고 간절한 생각에 마음이 약해진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SOS를 쳐볼까???
그러나 도저히 행동으로는 옮겨지지가 않는다.
3Camp에 데포 시켜 놓았던 쓰레기와 설피 그리고 스틱을 찾은 후, 설피를 신고 조금씩 조심조심 움직여보니
통증은 있지만 눈 속으로 발이 빠지지 않으니 좀 낳은 것 같다.
일행들에게 걱정을 끼치며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옮기다보니 요령이 생긴다.
발뒤꿈치가 빠지지 않으면 조금 통증이 덜하다.
또한 왼발을 길게 걷고 오른발을 짧게 절룩이며 걸으니 속도가 조금 느리다.
그러나 일행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부지런히 서둘러야 랜딩포인트까지 갈수 있기에 통증을
참아가며 부지런히 걷는다.
이런 와중에 용주형이 썰매에 매달은 확보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지 썰매가 자꾸 나를 때리거나 옆으로
쓸려 내려가면서 자꾸만 나를 넘어뜨린다.
한번씩 넘어질 때 마다 오는 그 통증은 그야말로 죽을 정도로 아프다.
처음에는 용주형에게 “형 도와줘”, “형 살려줘“하고 애원을 하다가 조금 지나도 계속되자 ”형 진짜??“
”형 아이 XX"등 점점 강도가 세어지며 입이 거칠어지며 용주형을 원망한다.
그래도 나는 앞에 있는 Greg의 썰매에 신경을 바짝 써서 내려오는 동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게 했다.
용주형에게 걷는 것은 설피를 신고 있으니 대충 걷고 앞 사람 썰매나 신경 써서 확보를 보며 걷자고 제안
하였으나 마찬가지다.
눈은 녹아서 설피나 스키를 신지 않으면 너무 깊이 빠져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을 정도다.
C1에 도착하니 저녁 8시 30분이다.
Tim이 여기서 자고 내일 새벽 5시에 출발해서 랜딩포인트로 가잔다.
그동안 우리들의 의사가 한 번도 반영된 적이 없었기에 내가 동료들의 의사를 종합하여 L.P까지 그냥 내려가자고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결국은 C1에서부터 L.P까지는 크레바스가 너무 많고 포근한 날씨라 너무 위험하여 갈수가 없다는데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린 마음이 급하다, 선배님을 잃었고 내일 아침 첫 비행기라도 타고 싶은 심정이다”고 얘기를 하니
결국 2시간을 양보 받아 새벽 3시에 출발하기로 하고 텐트를 설치했다.
내가 고집을 피운 이유는 이제 식량이 다 떨어지기 시작했고, 또한 워낙 날씨가 변덕이 심해 어디서 또 다시
갇히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 이었다.
알파미와 건조 북어국으로 식사를 하고 배낭도 풀지 않은 채 23:00부터 새벽 01:30까지 잠을 잤다.
7월 2일(일)
결국 3시 45분 맑은 날씨에 감사하며 C1을 출발하고 3번의 휴식 끝에 랜딩포인트에 도착을 했다.
이제 이 지긋 지긋한 눈밭을 탈출할 준비를 한다.
데포 시켜 놓았던 소주를 꺼내어 신선배님께 제를 올리고 기다리니 08:45에 탈키트나 Air Taxi가 온다.
비행기가 제법 크다싶어 확인해보니 8인승이라 한다.
일행 7명 모두가 한 비행기에 탈 수 있었으나 어느 순간엔가 또다시 구름이 몰려오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이곳 랜딩포인트에 구름만 끼면 아래서 비행기가 올라오질 않는단다.
오로지 시계비행에만 의지해야하기 때문이란다.
다행히도 올라온 비행기는 착륙은 힘들어도 이륙은 가능하다고 한다.
만약 Camp 1에서 5시에 출발 했다면 오늘 역시도 눈 속에서 하룻밤을 더 지새웠어야 될 판이었다.
탈키트나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에야 그 지긋 지긋한 눈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Alaska Mountain School에 들러 렌트한 장비를 반납하고 있으니 오갑복 선배님께서 오시고, 레인저 소장,
AMS사장, 팀장, 가이드가 모두 모여 총평을 했다.
주된 주제는 신선배님의 주검에 대하여 이뤄졌다.
우리의 결론은 “무리한 운행”과 너무도 일방적인 가이드의 권위로 집약되었다.
한국인의 스타일은 50분 걷고 10분 휴식 또는 언덕이든 힘이 많이 들어가는 구간을 올라섰을 때 등 상황에 따라
휴식을 취하는데 여기 가이드들은 1시간 30분을 걷고 15분을 휴식 취하는 것을 법으로 알고 집행하는 듯하다.
Mr. 데러(레인저 소장)가 신선배님의 여권과 배낭들을 맡기면 전체 리스트를 작성하여 유족에게 전달하겠다고
하며 마무리를 짓고 오선배님의 와실라로 향했다.
인터넷 전화를 이용 집으로 전화를 하니 그동안 아내가 걱정과 함께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었는지 짐작이 갔다.
사고 직 후 뉴스로 신선배님의 소식은 접했지만 어떤 사고인지를 알 수가 없었고, 나머지 일행들의 소식을 도저히
알 길이 없어 애만 태웠단다.
아내와 통화를 해보니 이제야 내가 그 고생 속에서 무사히 돌아 왔다는 안도감과 실패로 끝난 등반의 아쉬움이
교차하며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결국 목이 메어 더 이상 통화를 할 수가 없어 그만 서울에서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격려하고 걱정이 많았을 성권이 에게도 전화를 해서 안부를 전하고 나니 그동안 매킨리에서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다시 한 번 스쳐지나간다.
와실라 호숫가에 오갑복 선배님과 사모님께서 마련해 준 뒤풀이 시간에는 슈퍼에서 구입한 스테이크와
King Crap을 안주로 원 없이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7월3일(월)
고인이 되신 신경섭 선배님 유족들과 함께 화장 등의 절차를 위해 빅샘과 박병철씨를 와실라에 남겨두고,
나와 용주형 그리고 김인백씨 만이 앵커리지에서 밴쿠버로 철수를 하고,
7월4일(화)
밴쿠버에서 인천으로 날아와 입국하니 날짜는 5일로 바뀌어 있다.
매킨리를 다녀와서
아~~~ 매킨리~~
동료를 잃는 등 한없는 아쉬움만이 남았던 매킨리
등산에 있어 정상의 등정만이 모든 것은 아니리라
혹자들은 말한다, “후퇴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가 진정한 산악인이라고”
그러나 내게 있어 매킨리라는 산은 아무 때나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많은 비용문제도 그렇거니와, 같이 등반 할 팀원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특히 25일 정도의 시간을 낸다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였기에...
데날리라는 산은 정말로 한 번에 끝내고 싶었던 산이다.
나의 등산 세계에 있어 어쩌면 내겐 단 한번뿐인 기회였을지도 모르기에, 그 어떤 난관이 봉착해도,
설사 목숨을 잃는다고 하여도,...
아내 역시 내게 말한다.
그동안 많은 산을 보내놓고도 이렇게 불안해 보기는 처음이라고,
지금 또 다시 그 어떤 어려운 산을 간다 하더라도 말리지 않겠지만,
"매킨리"만큼은 두 번 다시 보내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몇 달 후 무교동의 어느 고기 집.
용주형과 태삼, 그리고 나는 폭탄주를 들이키며 건배를 했다.
“매킨리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