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산

일본 북알프스 종주(2)

히말라야2 2008. 8. 21. 16:37

                              <<< 이 글은 친구 김세봉이 작성한 글 입니다>>>


 

2008년 8월 4일 월요일 (안개비, 점심 후 갬) 

야리가다케 - 오바미다케 - 나카다케 - 미나미다케 - 기타호다카다케 - 호다카다케산장 

 

못내 잠을 못 이루며 전전반측하다 3시 반쯤에는 기어코 자리를 빠져나왔다. 복도도 어둑어둑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벌써 등산장비를 정돈하며 헤드랜턴을 이마에 비끄러맨 채 출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유일하게 빛이 밝은 곳이 있었다. 바로 식당이었다.

 

식당 끝의 입구 쪽 계단에 앉아 산동(山東)에서 산 소책자 《맹자(孟子)》를 꺼내 읽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 뒤로 와서 앉기 시작한다.

아하! 이게 뭔가? 원래 사람들이 식사 순서를 위해 줄을 선 게 아니었다면 이건 내가 마치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선 것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싶어 그냥 한참 동안을 책을 읽은 다음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을 외치며 긴 대열을 빠져나왔다.

우리의 식사 시간은 5시에 예약이 되어 있어 다시 갔을 때도 여전히 그 줄은 변함이 없었고 더욱 길어져 있었다.

 

맨 앞자리에 있던 나는 이제 그 줄의 맨 뒤쪽에 다시 서게 되는 아이러니의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간단한 준비(칫솔질, 용변 따위)를 마치고 둘째 날의 산행이 시작되었다.

가는 안개비가 시야를 가렸기 때문에 출발부터 우비를 착용하고 배낭커버를 뒤집어 씌웠다.

 

장갑을 낀 양손에는 스틱을 굳게 잡은 채였다.

원래 야리가다케 정상에 올라가기로 한 계획은 날씨 관계로 취소되고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렸다.

그 때가 6시 15분경이었다.

 

오리무중이라고 하지만 오리가 아니라 바로 앞의 몇 사람이나 겨우 보일 정도로 시야가 좁아졌다.

가급적 일행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적정한 거리가 유지된 채 가다가 중간 중간 멈추어서기를 반복하는 행진의 연속이었다.

우리를 첫 번째 맞이한 봉우리가 오오바미다케[大口食岳 : 3,101미터]였고, 다음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나가다케[中岳 : 3,084미터]였다. 호가 중산(中山)인 기수가 중악이 자기의 봉우리라고 주장한다.

하기야 나가다케나 나가야마[中山]나 크게 다를 게 없으니, 우리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고 큰 인심들을 써댔다.

8시 35분경에 미나미다케[南岳 : 3,084미터]를 거쳐 12시 20분경에 키타호다카[北穗高]산장에 이르렀다.

 

가는 과정에 몇 개의 봉우리와 봉우리를 넘어야 했는데 제법 길이 험했다.

그나마 안개가 잔뜩 끼어 깊은 낭떠러지를 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보령제약에 다니신다는 분이 자진해서 위험구간에서 코치를 하기도 하였다.

 

좋은 경관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지만 가끔 구름이 비켜 선 자리로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

산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경탄을 자아내곤 했다.

키타호다카 산장에서는 산장에서 받은 도시락과 각자 준비해 온 반찬을 곁들여 식사를 하고 라면 국물 맛도 볼 수 있었다.

 

키타호다카 산장 바로 위인 키타호다카다케[北穗高岳 : 3,160미터]에서는 햇빛을 받아 젖은 옷과 신발을 조금이나마

말릴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사진 촬영 중 우리가 준비해 간 펼침 막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큰 현수막에는 ‘獨島는 韓國領’이라는 글자도 선명하게 씌어 있었는데 같이 간 일행들이 몹시 감탄을 하며 자신들도 이를

 

빌어 기념촬영을 하기도 하였다. 다소 일본인에게 자극적일 수 있는 문구 저 편 한쪽에 일본인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

산행 중에 느꼈지만 알프스 종주를 하는 사람들의 거개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사실이었다.

우리가 마치 한국에 있는 산을 종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오늘 구간에서 일본인의 숫자는

극히 드물었다.

 

잠시 동안의 휴식은 새로운 전진을 위한 숨고르기일 뿐이었다. 다시 강행군이 이루어졌다.

산 중턱을 끼고 돌다가 언덕을 넘어가는 일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돌들이 산재해 있었다.

곳곳마다 흰색의 동그라미들이 명멸하는 가운 데 우리는 화살표를 따라 진행을 하였다.

 

표시대로만 따라가면 거의 길을 벗어날 염려는 놓아도 될 정도로 친절한 안내판이 되어주었다.

상당한 배려가 페인트에서 덕지덕지 느껴졌다. 쇠사슬을 만나면 쇠사슬을 거머잡고 오르고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감싸

안고 몸을 솟구친다. 위험에 노출된 나무나 바위를 보면 뒷사람에게 ‘머리 조심’을 외치며 그렇게 행렬은 이어져 갔다.

 

이제 이 봉우리 저 봉우리를 엿보다 보니 ‘악(岳)’이 ‘다케’라고 하는 것이 머리에 완전 입력되었다.

다음 다케는 가라사와다케[涸澤岳 : 3,110미터]였다. 다행히 저녁나절에 가까울수록 날씨는 차츰 개어갔다.

가라사와다케에 이르기 전 어디쯤에서인가 성권이에게 차인 돌 하나가 산 밑으로 굴러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미노현상처럼 여러 돌들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아래로 질주하여 여러 사람의 시선을 모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눈밭을 달려가는 조그마한 원숭이 모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산행에서 원숭이를 보았다는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눈밭이 끝나고 돌들의 잔영이 길게 누운 평원지대에도 붉은 색의 산장과 함께 텐트촌이 마련되어 있었다.

가라사와다케에서 사진 촬영을 할 때 역시 현수막이 동원되었다.

누군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너의 용산 선배님들이다’라는 말이 들려와 확인해 본 결과 용산고 후배가 하나 자리에 있었다.

 

물어보니 용고 54회 이지열이라고 한다. 해외의 깊은 산중에서 후배를 만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북알프스종주’ 글자가 들어간 우리의 작은 깃발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얼마간 가라사와다케에 머물며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건너다 뵈는 오쿠호다카다케를 비롯한 주변 산을 둘러보았다.

 

잠시 사이에 구름이 산을 가렸다간 흩어지기를 누차 반복하고 있었다.

산장이 바로 아래였기에 우리는 보다 여유 있게 그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

역산이 어떤 조처를 취하기 위해 먼저 산장으로 내려갔고 한참 후에 우리 또한 산장으로 향하였다.

 

호다카다케[穗高岳]산장에 도착하니 5시에서 5분이 지나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놀라운 일이 하나 발생하였다.

당연히 요코 산장 쪽으로 내려갔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K선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제 고산증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할 상황이라서 역산의 단호한 의지에 의해 하산하기로 하였건만 그 분은 우리 일행과

 

떨어진 채 우리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한편 놀라우면서 한편으로 몹시 반가운 조우였다.

어떤 친구는 농담으로 그 덕분에 그 분이 가지고 있는 까뮈를 맛보게 되었노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호다카다케에서의 일몰은 일출을 보지 못한 우리에게 그나마 위안이 될 만한 것이었다.

 

해가 산속으로 잠입한 것이 아니라 구름 속으로 숨다보니 붉은 해는 모습을 감춘 뒤 둘로 쪼개지기도 하고,

한 일자(一) 모습을 연출하며 산장의 저녁을 예고하였다.

날이 어둑해진 자리에는 다시 초승달이라 할 만한 아미(蛾眉)가 대신하여 객수를 달래주었다.

 

그 주변에는 별빛이 수를 놓아 밤하늘임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호다카다케 산장 역시 잠자리가 그리 넉넉한 편은 되지 못하였다.

식사 후 진탁이를 제외한 용두팔 7명은 식당의 한 구석을 장악하여 가벼운 폭탄주를 들었다.

 

마침 옆을 지나가는 후배를 만나 봉환이가 맥주를 권했고, 얼마 후 그 후배는 맥주 다섯 캔을 사들고 와 우리에게 전한다.

용고의 끈끈하고 돈독한 선후배간의 정은 해외라고 예외일 수 없었던 것이다.